가아~끔,, 아주 가아~끔 말입니다,, ㅋㅋㅋ (밑밥깔기)
그 어떤 무엇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고픈데
무작정 전문서적으로 파고 들기에는 어렵고
게다가 기본적인 개념도 애매하고 할 때요,,
저는 K-MOOC를 이용하거든요,,
http://www.kmooc.kr/
K-MOOC는 한국형 Massive Open Online Course 로
대학 수준의 강의를 (꼭 대학 강의만 있는 건 아니라서;;;)
비대면으로!! 무료로!! 수강 가능한데
잘만 활용하면 잼나게 전공 지식 습득 SSAP 가능!!!
물론 지식 습득 외에도 공개 강의이다 보니까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가 있어서
저는 가아~끔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정보 수집 차원에서 궁금한 게 있어서 둘러보다가
아니 이건 뭔가요!!
너무 잼날 것 같은 강의명이 눈에 띄는 거예요!!참고로 요즘 들어 조선시대에 관심이 많은 자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이라면 누굴까나??
글서 주저하지 않고 [청강등록]부터 일단 하고
찾으려던 정보 수집 다 하고 난 후
[학습하기] 클릭클릭
긍데 이 동영상이 원래는
"차이나는 K-클라스" 라는 프로그램으로
작년 하반기에 JTBC에서 방송 했었더라구요
그 중 유홍준 선생님께서 진행하신 2화,
"K 컬처의 뿌리,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 이었던 것이었슴다유홍준 선생님 늠 므쪄요!! 😍
유홍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조선회화의 양대 거장은
두구두구두구!!!!!! (제목에 스포 어쩔;;;)
겸재 정선 과 단원 김홍도 였습니다!!그 중에서도 유홍준 선생님은 단원 김홍도를 최고로 꼽으셨어요!!
그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인지
비교를 통해 요약해보겠슴당~
겸재 정선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라 하는데요,
대표작으로 <인왕제색도> 가 있죠
비 온 뒤 안개 걷힌 인왕산의 모습을
먹의 농담으로만 생동감 있게 그려내
국보로 지정된 작품입니다
정선이 만 75세에 그린 것으로
화가로서 성숙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정선은 30대에 금강산에 두 번 다녀온 후
20여 년이 지나 <금강전도>를 완성하는데요
이 그림은 그동안의 산수화와는 다른 주체적인 화풍으로
금강산의 디테일을 재해석하여 표현함으로써
'핍진하다', '신운이 감돈다' 라는 평가와 함께
진경산수화를 만들어냅니다
핍진하다는 박진감이 있다 라는 말이고,
신운이 감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 그림이 살아있다 라는 뜻이랍니다
그럼 그 이전의 화풍은 어땠기에
정선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일까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 중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회화 교본에 해당하는
'중국화본'이 널리 보급되며 중국식 미술이 대중화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닌,
대표적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와 같은
상상 속의 산수를 그렸었는데요
이를 관념 속의 산수라 하여 관념산수화 라고 합니다
+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의 모습을 안견에게 들려주고 그리게 한 것임당,,
따라서 정선의 그림은 기존의 화풍과 달리
실제의 산수를 새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는 듯한 부감법으로 그려내어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정선은 양반 출신이어서
당시 화가로서의 업을 삼을 수 없었음에도
그림 그리는 일을 고집하였는데
결론은??
해피엔딩~ ㅎㅎㅎ
정선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당대 매우 인기가 높은 화가 였다고 합니다
특히 역관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교역을 위한 선물로 그림의 값어치 또한 매우 높게 책정되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은 조선 르네상스 초기의 거장으로
한 줄로 요약하자면,
영조 대의 양반 출신 대기만성형 진경산수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는 흔히 풍속화의 대가라 말하는데
실제는 모든 분야의 그림에서 천재성을 보인
날 때부터 천재형 화가였답니다
그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쓴 김홍도에 대한 글, <단원기> 에서
그의 천재성에 대해 극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원기[檀園記]
예나 지금이나 화가는 각자 하나만 능숙하지 두루 솜씨가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김홍도 군은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전공하여 못하는 것이 없다. 인물(人物)ㆍ산수(山水)ㆍ선불(仙佛)ㆍ화과(花果)ㆍ금충(禽蟲)ㆍ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옛 사람과 견주더라도 맞설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신선도나 화조도에 더욱 솜씨가 있어 이미 한 세대에 유명하고 후대까지 전할 만하다. 우리나라 인물이나 풍속을 그리는 데는 더욱 능하였다. 예를 들어 선비가 공부하는 모습ㆍ상인이 시장에 나서는 모습이나 나그네ㆍ규방 여인ㆍ농부ㆍ누에치는 여자ㆍ장군ㆍ이층집ㆍ황량한 산ㆍ들판의 물에 이르기까지 모습을 곡진하게 그려서 그 모양이 실물과 차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무릇 화가들은 모두 전해오는 그림을 따라서 배우고 익혀서 솜씨를 쌓은 후에야 엇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독창적으로 터득하고 심지어 하늘의 조화를 오묘하게 얻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하늘에서 부여받은 재주가 남달라 세상 풍속을 훌쩍 넘어선 것이 아니겠는가. 옛 사람은 ‘닭이나 개를 그리기는 어렵지만 귀신을 그리기는 쉽다’라 하였다. 눈으로 쉽게 볼 수 있으면 대충해서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김홍도의 뛰어난 재주에 놀라며 지금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경지라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에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날로 많아져서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들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을 지경이다.
영조 조에 어진을 그릴 때 김홍도는 일을 맡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또 지금 임금[정조(正祖)] 때에도 명을 받들어 임금의 화상을 그려, 이를 크게 칭찬하는 뜻으로 특별히 찰방 벼슬에 임명되었다. 돌아와서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마당을 깨끗이하여, 좋은 화초들을 섞어 심었다. 집 안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먼지도 일지 않았다. 책상과 안석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와 고운 붓, 쓸 만한 묵과 희디 흰 비단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단원이라 호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주길 원했다.
내가 알기로, 단원은 명나라 때 이장형의 호이다. 김홍도 군이 본떠서 자기의 호를 삼은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그가 문사로서 고상하고 밝았으며, 그림도 기이하고 전아했던 것을 사모한 것일 게다. 지금 김홍도란 사람은, 생김새가 곱고 빼어날 뿐 아니라 속마음도 세속을 벗어나 있다. 보는 사람마다 그가 고아하게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지 시골의 촌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품상 거문고나 피리의 우아한 소리를 좋아하여 매번 꽃 핀 달밤이 되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의 솜씨가 옛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풍채도 훤칠하여 진나라나 송나라 때의 높은 선비 중 이장형 같은 사람에게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고원하여 그만 못할 것이 없다.
나는 노쇠한 나이에 군과 더불어 사포서(司圃署)의 동료가 된 적이 있다. 일이 있을 때마다 군은 번번이 나의 노쇠함을 걱정하며 내 대신 수고를 해 주었으니, 이것이 내가 더욱 잊지 못하는 바이다. 요즘에는 군이 그림을 그리면 으레 나를 찾아와서 한두 마디 평을 써 달라 했으므로, 궁궐에 있는 병풍이나 두루마리까지에도 더러 내 글씨로 쓴 것이 있다. 군과 나는 ‘나이를 잊고 지위를 잊은’ 채 교제한 사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단원에 대한 기문을 사양할 수 없고, 단원의 호에 대해서 말을 붙일 겨를도 없어서 대략 군의 평소 모습을 써주어 응하노라. 옛날 사람들은 소식(蘇軾)의 「취백당기(醉白堂記)」를 가지고 한기(韓琦)와 백낙천(白樂天)의 우열을 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제 이 기문에서, 이장형과 김홍도의 우열을 논했다 하여 사람들이 혹 나를 꾸짖지 않겠는가.
내가 김홍도 군과 더불어 사귀는 동안 앞뒤로 모두 세 번 변했다. 처음에는 김홍도 군이 어린아이로 내 문하에 다닐 적이다. 이때는 이따금 그의 솜씨를 칭찬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일러 주기도 하였다. 중년에는 함께 같은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었다. 말년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知己)의 감정을 느꼈다. 김홍도 군은 나에게 글을 구하였지 다른 이에게 구하지 않았다. 반드시 나에게 온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단원기 또 하나[檀園記 又一本]
찰방 김홍도의 자는 사능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그의 눈썹이 맑고 기골이 빼어난 것으로 보아, 세속에서 밥이나 지어먹는 사람의 기운은 아니었다. 이른 나이부터 기예가 뛰어나, 화원 중 진씨(秦氏)ㆍ박씨(朴氏)ㆍ변씨(卞氏)ㆍ장씨(張氏)도 한 수 아래일 정도였다. 무릇 누각(樓閣)ㆍ산수(山水)ㆍ인물(人物)ㆍ화훼(花卉)ㆍ충어(蟲魚)ㆍ금조(禽鳥)까지 그 모양을 꼭 닮아서 하늘의 조화를 빼앗기 일쑤였다. 조선 왕조 사백 년 이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풍속ㆍ세태를 그려내는 데에는 더욱 장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하는 수천 가지와 길거리ㆍ나루터ㆍ가게ㆍ점포ㆍ시험장ㆍ연희장 등과 같은 것도 한번 붓을 대기만 하면 사람들이 다들 크게 손뼉을 치면서 기이하다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서 ‘김사능의 풍속화’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만일 신령한 마음과 슬기로운 식견으로 홀로 천고의 오묘한 깨달음을 터득치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영조 말년에 어진(御眞)을 그리라고 당대 초상화에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았는데 군이 진실로 적격이었다. 일을 마치자 사포서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때마침 나도 관직에 있어 군과 동료가 되었다. 예전에는 아이로만 보았는데 이제는 같은 반열에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낮추 불러한스럽게 하지 않았고 군도 자기를 낮추고 공손하여 으레 함께 일하는 것을 영광스레 여기었다. 나도 군이 자만하지 않는 것에 감복하기도 하였다.
우리 임금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5년에 선왕의 성대한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어진(御眞)을 그리려고 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찾았다. 관료들이 모두 “김홍도가 여기 있는데 다른 데서 구할 것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은총을 입어 궁에 올라가서 마침내 감목(監牧) 한종유(韓宗裕)와 함께 그림 그리는 일을 마쳤다. 얼마 안 되어 영남의 역참 말을 살피는 관리가 되었다. 조정에서 예인을 등용하는 일이 진실로 오래도록 끊어졌는데, 군이 포의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임기를 다 채우고 다시 화원에 돌아와서는 때로 내각에 들어가 청연루(淸讌樓)의 모습을 그렸다. 바깥 사람 중에는 사실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임금께서는 미천하고 비루하다고 버려두지 않으셨으니, 군은 밤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했다.
김홍도는 이밖에 음악에도 능통하여 거문고와 피리의 곡조를 매우 오묘하게 했고, 풍류가 호탕해서 칼을 치며 슬픈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강개하여 간혹 몇 줄기의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듣자니 그의 거처는 모든 것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섬돌과 뜨락도 그윽하고 고요하였다 하니, 저자거리에 살면서도 속세를 벗어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옹졸하고 악착스런 사람이 겉으로는 비록 김홍도와 함께 어깨를 치며 너니 내니 하더라도 또한 어찌 김홍도가 어떠한 사람인 줄 알 수 있겠는가. 김홍도가 일찍이 이유방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그의 호를 본따서 단원이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김홍도는 정원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기문을 지어줄 수가 없다. 그래서 김홍도의 간략한 전기를 써서 벽 위에 이와 같이 붙여 놓으라고 준다.
김홍도는 중인 출신으로
일찍이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영조 때 왕, 왕세자,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고,
정조 때 또 한번 왕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렇게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무려 두 번이나 그리게 된 것이죠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종6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현감 부임 3년 만에 과부 중매(???) 및 사냥(???) 등의 이유로 감사에 걸리자 🤷🏻♀️;;;
정조는 김홍도가 형벌을 면하게끔 바로 파직 시킵니다오히려 잘 됐,, 그림만 그리면 되니까,,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 <씨름>, <우물가>, <무동> 등을 보면
생생한 리얼리티를 탁월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치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집중을
그림 안팎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래서 유독 풍속화의 대가라 칭하는데
그러면 서운한,, 아주 서운한,,
태생이 천재 화가였습니다찐천재 단원!!
그러나 천재 화가 김홍도는
말년에 생계가 매우 곤란해집니다
새드엔딩 ㅠㅠㅠㅠㅠㅠ
정조 사망 이후에는 후원마저 끊겼고
가난과 병마와 사투하며
60세에 마지막 작품인 <추성부도>를 그리고는
1년 여 만에 죽음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ㅠㅠㅠㅠㅠㅠ
더욱 노련한 천재성이 깃든 작품을 더 이상 보지 못 하는 것에
많이들 아쉬워합니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 르네상스 중흥기의 거장으로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정조 대의 중인 출신 천재 화가!!
이상 아주 걍 빨려들어가듯 잼난 강연의 써머~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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